<눈물을 마시는 새>의 서사구조 비평입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본작을 안 읽으신 분은 절대 보지 마세요.
0. 들어가기 전에
작가 이영도는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비하하지도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매우 강렬하지만 훈계하려 하지 않는 그의 커다란 자의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던지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 하나를 더하고 싶어할 뿐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분명 장르적으로 환타지에 해당되며, 수많은 한국적 요소들이 가득하다. 한국 설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이 분명한 도깨비는 인간을 킴이라고 부르며, 말은 단순히 창작의 질료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이기 때문에 가능한" 고대 아라짓 어라는 개념을 동반한다[각주:1]. 정형화된 환타지[각주:2]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요소들을 바라보며 독자들이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사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수많은 독자들이 "한국적 환타지의 가능성" 운운하며 극찬하는 가운데에서도 이영도는 그저 콧방귀만 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건 당연하다.
그라탕에 냉이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걸 "한국적인 그라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도우를 밥으로 만든 라이스피자를 "한국적인 피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라탕을 냉이로 만들든 두릅으로 만들든 그건 그라탕이며, 피자 도우를 밥으로 하든 죽(!)으로 깔든 그건 피자이다. 그라탕은 밥을 지어 모짜렐라 치즈를 곁들여 오븐에 구워낸 음식이며, 피자는 도우를 깔고 그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은 뒤에 토마토 소스와 모짜렐라 치즈로 마무리한 뒤 오븐에 구워낸 음식이다.
이영도의 글은 "소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자면 "환타지 소설"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료들을 사용하는 데 점점 더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고집 센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한" 많은 독자들의 입맛에도 맞는 글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물론 보수주의자들에게 고집은 세끼 식사보다 중요하니까 그들은 무시하자.
이영도의 글을 규정하는 서사구조는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드래곤 라자>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글은 기교적으로는 점점 더 완성되어 왔지만 기본적인 서사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는 후치가, 율리아나 공주가, 케이건 드라카가, 그리고 지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움직임의 끝에는 단지 개인적인 단위로 끝나는 무언가가 아닌, 범 세계적인 규모의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핸드레이크의 좌절, 하이마스터의 선택, 천지척사, 그리고 장생.
이 글에서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이미 그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까지 완결된 마당에 너무 늦은 감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피를 마시는 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전작이자 그 메타텍스트인 <눈물을 마시는 새>가 필연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눈물을 마시는 새>만 갖고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엄청난 이야깃거리가 쏟아져나올 것이 뻔하니 처음부터 <눈물을 마시는 새>를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인물분석은 생략한다. 하지만 "생략된 인물분석 결과"가 여기저기 글에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분명히 짚어둔다. 결국 이 글은 자기만족을 위한 글이며, 별로 독자를 배려하고 있지 않으니까.
1.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이영도는 글의 서사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장치를 준비하고, 그것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작가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서사구조는 두 문장과 하나의 놀이로 요약된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하나가 셋을 부른다." 그리고 '윷놀이'가 그것이다.
이야기 전반부가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로 요약된다면, 후반부는 "하나가 셋을 부른다."로 요약된다.
상대해야 할 하나가 있다면, 그것을 상대할 셋은 각자의 역할분담이 정해져 있다. 길잡이는 상대할 하나에게 일행을 인도하며, 대적자는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상대들을 때려눕힌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리하며 여러 가지 특이한 능력으로 일행을 보조하는 것이 요술쟁이이다[각주:3].
그리고 셋과 하나의 관계는 "합치면 넷"이라는 구조상 보통 네 선민종족이 그 자리에 각각 하나씩 대입된다. 이야기의 시초인, 신명을 가진 나가 아스화리탈 세파빌(화리트)을 안전하게 하인샤 대사원으로 구출해 오는(이것도 상대하는 방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구출대의 삼인은 각각 인간과 도깨비, 그리고 레콘으로 구성된다. 한계선 이남의 나가가 키보렌을 확장하기 위한 대확장 전쟁을 벌였을 때 북부에서는 세 선민종족이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갇혀 있는 어디에도 없는 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물론 이것도 그를 "상대하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없는 여신과 자신을 죽이는 신, 그리고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 모여야만 했다.
즉,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서사구조 전체를 떠받치는 대명제 중 하나는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둘에 관해서는 뒤에서 언급한다.
2. 길잡이 - 케이건 드라카 / 인간 / 발자국 없는 여신
케이건 드라카가 구출대의 길잡이로 선택된 이유는, 그가 나가와 키보렌에 관한 한 북부인 최고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일행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길잡이는 누구보다도 상대할 대상과, 상대하게 될 장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케이건 드라카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길잡이는 여정의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길잡이"라고 한다.
세 명의 신들 중 길잡이는 발자국 없는 여신일 것이다. 한때 여신의 신체였던 요스비는 케이건 드라카의 친구였다.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그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만, 요스비는 케이건 드라카와 신뢰 관계를 유지했으며(그것도 나가가!), 그를 찾아가는 대신 그가 자기 발로 발자국 없는 여신을 찾아오도록 획책했다.
사실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과 발자국 없는 여신 중 누가 길잡이이며 누가 요술쟁이인가에 대한 문제는 조금 애매하다. 하지만 나는 발자국 없는 여신을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장소까지 모두를 이끈 것은 발자국 없는 여신이니까. 스스로 찾아가는 대신 모두를 불러들였기에 그렇다.
3. 대적자 - 티나한 / 레콘 / 자신을 죽이는 신
길잡이나 요술쟁이와 달리 대적자가 할 일은 명확하다. 방해되는 것을 다 때려눕히는 게 대적자이고, 최후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받아든 순간부터 그것을 놓는 순간까지 언제나 전사인 레콘은 대적자에 잘 어울린다. 50년쯤 후에 영웅왕과 거의 동급으로 여겨지는 신화적 존재가 되는 티나한, 자기 키의 두 배쯤 되는 철창을 들어 보이며 무기야말로 레콘의 성(姓)이라고 말하는 티나한은 정말로 모범적인 레콘이다. 대적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죽이는 신이 대적자인 것도 너무나 명확하다. 과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신의 소멸에 사용된 것이 그의 불이었고, 그가 하텐그라쥬의 심장탑 51층까지 오면서 행한 파괴행위는 그의 대적자로서의 면모를 잘 부각시킨다. 그는 담백하고 과격하다. 그런 그가 가장 비폭력적인 선민종족인 도깨비를 가호하는 신이라는 점은 정말로 아이러니이지만.
4. 요술쟁이 - 비형 스라블 / 도깨비 /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라고 한다. 키보렌에서 비형이 한 일은 요술쟁이의 진면목이라고 할 만 하다. 나가 정찰대의 눈을 속이고, 일행의 취사를 책임지며, 비오는 날 급조된 피난처의 온기를 담당하며, 미로에서 길을 잃었을 때 불을 밝혀 일행을 보조하는 일이 그가 한 일이다. 그는 일행을 이끌거나 직접 방해자를 대적하지는 않지만, 그가 없으면 일행이 매우 지리멸렬해질 것이다. 요술쟁이가 하는 일은 그런 일이다.
일행을 북부군이 있는 하텐그라쥬까지 안내하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을 길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법 하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생각하면 그는 길잡이보다는 요술쟁이에 어울린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형 스라블이 딱정벌레에 일행을 실어나른 것처럼,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은 아주 특별한 방법을 통해 일행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5. 하나는 셋을 부른다. - 륜 페이 / 나가 / 어디에도 없는 신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한다. 이것은 상대할 필요성이 있는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반드시 셋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그 하나가 나타나면 그 하나를 상대하기 위한 셋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선언과 "하나가 셋을 부른다."는 선언은 본질적으로 같다.
화리트를 구출하기 위해 셋으로 된 구출대가 조직되었다(실제로 구출해 온 것은 륜 페이였지만). 발자국 없는 여신의 힘을 상대하기 위해 북부는 나머지 세 신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한다. 갇혀 있는 어디에도 없는 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다른 세 신이 모여든다.
셋이 하나를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는 셋을 모여들게 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온전히 "셋이 모여들어 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마침내 셋이 모였고, 셋은 하나를 일깨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넷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서사구조 전반을 지배하는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6. 윷놀이의 모티프
"말 잘했다. 윷놀이는 윷가락 네 개로 하는 거다!"
"네, 셋은 부족하지요."
윷가락 세 개로 윷놀이를 해봤자 지리멸렬할 뿐이다. 하나의 신이 갇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은 변화를 잊고 천 년의 정체에 빠져든다. 어디에도 없는 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셋이 모여든다. 그리고 윷가락은 다시 넷이 되었다.
넷이 되어야 놀 수 있다. 작가는 윷놀이의 모티프를 차용해서 이야기의 끝을 깔끔하게 마무리짓는다. 하나가 셋을 부르고, 셋이 하나를 상대하지만, 하나는 배제되지 않고 셋과 합쳐져 넷이 된다. 그리고 윷놀이는 계속된다.
7. 천지척사에서 장생에 이르기까지 - <피를 마시는 새>로의 연결고리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 신은 다른 한 신을 다시 윷놀이판에 끌어들여서 윷놀이를 이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피를 마시는 새>에서 500조 이상의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서도 서로 멸망하지 않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바둑의 화국, 그것도 무한의 바둑돌이 죽어나가는 장생[각주:4]이라는 이름의 자살패로 치환된다.
셋은 하나를 상대하지만, 결국 넷이 된다. 화국은 반상 맞은편의 상대방이 살아 있어서 승부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보장한다.
바둑은 윷놀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놀이이다. 그 점에서 바둑은 재생산된 변화의 시대를 나타내기 매우 적합한 소재로 생각된다.
이렇게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피를 마시는 새>의 시대로 이행한다. 더 자세한 건 다음 비평문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 <피를 마시는 새>의 서사구조 관련 글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8. 무한한 변화의 장
이렇게 졸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이 "빌어먹을 가필"이 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빌어먹을 가필"조차도 작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굳이 이런 짓을 한다.
이것이 내가 해석한 <눈물을 마시는 새>이고, 다른 누군가의 동의를 구할 생각 같은 건 없다. 작가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해석된 작품은 나만의 것 아니겠는가.
주1. 고대 아라짓 어의 구성은 고대 한글의 음차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는 한때 변화했지만, 천 년 넘는 세월동안 언어가 고정되어 있었다는 시우쇠의 폭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고대 아라짓 어의 시스템은 단순히 서술의 질료로서 언어를 이용하는 것을 벗어나 "한글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글에 이용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모든 소재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갖고 있는 걸 갖다 쓴 것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실제 고대 한글을 완벽하게 표기하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겠지만, 그가 의도한 만큼의 효과를 내는 데는 음차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절대 결벽주의자가 아니다. ) [본문으로]
주2. 사실 "정형화된 환타지"라는 말 자체가 모순된 선언이다. 환타지는 말 그대로 환상문학을 의미하며, 환상에는 어떤 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정형화된 환타지"라는 표현 자체가 정형화된 채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주3. <피를 마시는 새>에서 이라세오날을 향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오만하게 걸었던 레콘 지멘이 길잡이, 이라세오날을 향해 가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진 레콘 히베리가 대적자,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게 "다시 올려보내지."라고 말하며 이라세오날을 먼 하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려버리는 레콘 쵸지가 요술쟁이였던 구도에서 착안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주4. 장생이라는 이름의 자살패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장생은 일반적인 패와 달리 팻감 없이 서로 무한정으로 상대방의 사석을 늘리는 게 가능한 기이한 구조로, 어느 한 쪽이 패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바둑이 무한정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사석은 엄청나게 쌓이지만, 바둑 자체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500조 이상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는 역설적 희망에 매우 잘 부합하는 상황이다.
(바둑 대국에서 장생이 발생할 경우 한국 바둑 규칙에서는 바로 무승부 처리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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